
뉴스1과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명품 커머스 플랫폼 발란(BALAAN)이 기업회생 절차에 돌입했다고 한다. 기업회생은 파산과는 달리 지속적인 운영을 목표로 회사의 채무를 조정하기 위해 채권자, 주주 등 여러 이해관계자들을 조율하는 과정이다.
3월 4일 발란은 직전 기업가치인 3,000억원의 1/10 수준인 300억원 가치로 실리콘투로부터 15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 중 75억원이 1차적으로 CB (전환사채) 형태로 투자되었으나, 24일 입점 판매자들에게 예정일보다 2~3일 늦게 정산이 진행된다고 공지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긴급 미팅 진행을 위해 발란 사무실에 방문한 일부 판매자들은 회생을 준비하며 정산금 지급을 미루는 중이라는 증거를 제시했고, 발란은 26일부로 재택근무로 전환하면서 사실상 제 2의 티메프 사태로 번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전세계가 일시적인 경제위기를 겪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유동성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버티컬 서비스(Vertical은 수직적이라는 뜻의 영단어로, 해당 분야에 깊은 전문성을 가지거나 특화된 서비스를 의미)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났다. 이 때 급증한 명품 소비에 힘입어 국내 명품 이커머스 버티컬에서도 머트발(머스트잇, 트렌비, 발란) 등의 스타트업들이 급증하는 거래액을 토대로 수백억원의 투자금을 각각 유치했다.
이들은 백화점 대비 저렴한 가격과 모바일 앱의 편의성을 토대로 앞으로 명품 소비가 온라인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가설을 전제로 버티컬 이커머스 사업을 운영했으나, 고금리 시대를 맞아 명품 소비가 전반적으로 둔화되고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들을 주 고객으로 두고있는 이들은 매출이 급격하게 하락하며 장기적인 수익 구조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누구보다 앞서서 국내 이커머스 시장은 쿠팡과 네이버로 양분될 것이라고 전망했던(그리고 쿠팡이 궁극적으로 승자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던) 필자의 예상대로 작년 큐텐 계열사인 이커머스 플랫폼 티메프(티몬 + 위메프) 정산금 미지급 사태가 일어나며 자연스레 춘추 전국시대를 연상케 했던 국내 이커머스 시장은 쿠팡이 독보적인 1등으로 재편되고 네이버가 겨우 추격하는 모양새로 재편되었다.
경제가 양적으로 팽창하면 주머니가 넉넉해진 사람들이 여러가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가지에만 집중하는 버티컬 플랫폼이 인기를 얻지만, 긴축으로 돌아서는 시기에는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 효용을 얻기위해 여러가지를 동시에 제공해주는 플랫폼이 주도권을 다시 쥐고 온다. 이렇게 버티컬이 유행하는 현상을 '언번들링'이라 하며, 다시 이들이 통합되는 과정을 '번들링'이라 한다.

위 2023년 3월 필자가 넷플릭스(NFLX)에 대해 포스팅한 페이스북 글을 읽어보면 번들링 현상에 대한 이해가 더 쉬워질 것이다. 스트리밍(OTT) 업계에서 최근 번들링은 가속화하고 있는데, 글에서 언급했듯이 넷플릭스 외에는 수익을 창출하는 스트리밍 회사가 없기 때문이다. 디즈니+를 출시하며 타사 스트리밍 플랫폼에 콘텐츠 배급을 중단했던 디즈니(DIS)는 다시 넷플릭스에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고 미국 케이블 TV 회사 Comcast는 넷플릭스, Hulu, Apple TV+ 등 여러 스트리밍 서비스를 묶음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늘부로 SK 스퀘어 한명진 대표는 "티빙과 웨이브의 합병심사가 진행중"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는데, 예고했던대로 국내 스트리밍 플랫폼들의 consolidation (합병, 구조조정)은 전적으로 필요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여러 다른 산업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대표적인 예로 소프트웨어 시장이 있다.

2024년 마이크로소프트(MSFT)의 연간 매출은 약 2,450억 달러, 세일즈포스는 99억 달러를 기록했다. 반면 국내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시장 전체 매출은 25억 달러 수준으로, 글로벌 SaaS 선도 기업 한 곳과의 격차가 수십 배에 이른다. 이 차이는 단순한 시장 규모 차이를 넘어, 제품 전략, 고객 락인 구조, 통합적 플랫폼 경쟁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수치다.
특정 산업에 특화된 버티컬 SaaS 스타트업들이 다수 존재하지만, 대부분 기능 단위의 단편적 솔루션에 머무르고 있다. 예외적으로 센드버드(Sendbird), 몰로코(Moloco), 채널코퍼레이션 등은 글로벌 고객을 확보하며 통합형 B2B 플랫폼으로 확장하고 있지만, 이런 사례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일본 SaaS 기업들이 수천억 원 규모의 ARR(Annual Recurring Revenue)로 상장에 성공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국내 SaaS는 아직 글로벌 진출과 구조적 번들링 역량에서 후발 주자에 머물러 있다.
결론: 지금 필요한 건 '스페셜티'가 아니라 '인프라'
기능이 특화됐다는 건 이제 더 이상 경쟁력이 아니다. 기업들이 진짜 필요로 하는 건, 조직 전반의 워크플로우를 자연스럽게 통제할 수 있는 디폴트 인프라다.
SaaS도 결국 플랫폼 싸움이다. 개별 SaaS의 기능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기능을 일관된 UX와 비용 구조 안에서 제공할 수 있는가가 기준이 되는 시대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세일즈포스가 증명한 것처럼, '툴'이 아니라 '환경'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로 SaaS 시장도 전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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