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의 파운드리 부문부터 전통적으로 기술 우위를 유지했다고 알려진 메모리 부문까지 총체적 위기라는 사실이 대내외로 알려지며 주가가 연일 52주 신저가를 기록중이고 외국인들은 삼성전자 주식 비중을 가파른 속도로 줄이고 있다.
며칠전에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20년간 삼성전자에서 재직한 엔지니어의 익명 인터뷰를 가감없이 게재하며 사회각계의 여러 인사들이 삼성전자에 대한 우려를 표명중이다. 대부분 업계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해석이기에 사실을 기반으로 한 전반적인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이 글을 작성한다.
파운드리 사업부의 실패: 문제는 기술력
매출 집계 방식에 따라 삼성전자 파운드리 부문은 세계 2위 혹은 3위로 추정된다. 1위는 압도적인 격차로 TSMC이고 2위와 3위는 삼성전자 내부거래를 파운드리 매출로 인정하는지에 따라 삼성전자와 인텔이 엎치락 뒤치락 한다.
"세계 2, 3위 정도면 괜찮은거 아닌가?"라고 반문 할 수 있지만 파운드리 업계의 양상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운드리 서비스는 선단공정(7nm 이하 최첨단공정)과 레거시 공정(16nm 이상 성숙공정)으로 나뉘는데, 선단공정에 들어가는 설비투자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아예 경쟁을 포기한 업체들을 제외하면 플레이어가 TSMC, 삼성전자, 인텔 세 기업밖에 없다. 전교 3등인데 전교에 3명밖에 없는꼴이다.
투자 먼저, 고객사 확보는 나중
자료를 보면 지난 2년간 TSMC의 시장 점유율은 소폭 상승했으며 삼성전자는 비중을 유지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지난 2019년 4월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을 공개하고, 오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입해 설계와 파운드리 등을 종합한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글로벌 1위에 오르겠다는 비전을 공표했다는 것이다.
당시 삼성전자는 막강한 현금 동원력과 대규모 설비투자를 기반으로 TSMC를 넘어서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이는 실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평택의 파운드리 신공장과 미국 텍사스 테일러 신공장이 바로 그 결과물이다. 문제는 공장은 지었거나 짓고 있는데 고객사가 없다는 것. 10월 18일 "삼성 美 테일러시 파운드리 공장 ASML 장비 인도 미뤄" 기사가 나온것을 보면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에서 생산할 고객사 물량이 거의 없다는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했듯이 파운드리 선단공정에 들어가는 반도체 장비는 한대에 수천억원씩 하며 따라서 공장을 새로 지으려면 최소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이 소요된다. 전세계에서 이 정도 투자를 고객사 확보도 없이 단행할 수 있는 제조기업은 사실상 삼성전자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너 가문이 지배중인 기업이기에 가능했던 결정이다.
비슷한 시점인 2021년 말 TSMC는 애플, 퀄컴,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들에게 미래 생산 용량을 확정하는 조건으로 선수금을 요청했고, 실적발표에서 관련 부채 5조원 가량을 계상했다. 당시 분기 매출의 1/4에 달하는 수준이다. 선수금이란 매출이 발생하는 시점 이전에 현금을 미리 받는것을 뜻한다. 제조기업의 흔한 애로사항 중 하나가 생산 과정에 소요되는 운전자본을(원재료, 재고, 인건비 등 매출이 발생하기 이전에 묶이는 현금) 확보하는것인데, TSMC는 이를 선수금 받아서 해결한 것이다.
고객사 확보 이전부터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삼성전자와, 고객사에게 물건을 인도하기도 전에 거액의 선수금을 요구한 TSMC의 협상력 차이는 회사의 궁극적으로 기술 경쟁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애플, 퀄컴도 (정말정말) 삼성전자에 맡기고 싶다
"국감서 노출된 삼성전자 사업부 딜레마" 기사에서 발췌한 더불어민주당 정진욱 의원의 국정감사 발언 중 일부:
설계 전문회사들이 최첨단 설계도를 설계회사에 보여줄 리 없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쪽 TSMC를 따라갈 기회는 있다. 빅테크들은 세컨소싱하고 싶어 한다. 삼성만큼 TSMC에 가까운 기업도 없다. 삼성이 지금이라도 시스템반도체 설계부분을 과감히 매각해야 한다. 매각만 해도 믿지 않을 수 있다. 징벌배상과 디스커버리 같은 걸 입법청원해야 한다. 그럼 진정성을 믿을 수 있고 마지막 기회의 창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설계 부문(시스템 LSI)과 파운드리(위탁생산) 부문이 함께하기 때문에 첨단 반도체 설계도를 삼성전자에게 보여주는걸 꺼려할 것이고, 그래서 삼성전자가 고객사 확보를 못한다는 논리이다.
"메모리 반도체, SK 하이닉스가 답인 이유"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필자는 삼성전자가 모바일과 가전, 메모리, 파운드리 총 3개 사업부로 분사하는것이 합당하지만 이재용 회장의 입장은 그렇지 않을것이기에 논외로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조직론점 관점에서 분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지, 삼성전자의 이해상충 문제에 관련해서 논평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진욱 의원의 발언과 뉴스토마토의 자료처럼 삼성전자의 사업부 간 이해상충 관계가 존재하는것은 사실이고 이를 해결 하는것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하나,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시장에서 가장 많은 물량을 필요로 하는 애플과 퀄컴이 삼성전자에게 물량을 맡기지 않는 근원적인 이유는 뒤쳐지는 기술력 때문이다.
애플이 아이폰을 최초로 출시할 때 사용했던 AP는 삼성전자 시스템 LSI 사업부가 설계하고 파운드리 사업부(당시에는 사업부가 아니었음)가 제조한 칩셋이다. 애플과 삼성전자의 가까운 협력관계는 아이폰 3G, 3GS까지 이어지며 이후 아이폰 4에 탑재된 A4 칩셋부터 애플 자체 설계를 적용하였으나 계속해서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통해 위탁생산했다.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를 초기에 적극적으로 밀어주며 성장시켰던 고객사가 바로 애플이다. 퀄컴 또한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사용해 자사의 플래그십 AP를 생산했던 전적이 있다.
애플과 퀄컴처럼 수억개의 생산물량을 필요로 하는 기업들은 필수적으로 공급망 다원화를 원한다. 개당 단가를 낮출수도 있고 혹시 모를 공급 리스크를 완화시킬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폰용 칩셋을 생산하는 TSMC 공장에 불이나서 2주간 생산이 중단되면 현재로선 애플이 할 수 있는일이 없고, 결국 매출 감소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애플은 실제로 2015년 아이폰6S에 탑재되었던 A9 칩셋의 생산을 TSMC의 16nm 공정과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의 14nm 공정으로 이원화한 전례가 있다. 당시 이른바 '칩게이트'가 터지는데, 삼성전자가 제조한 A9 칩셋을 탑재한 아이폰 6S 모델이 고부하 환경에서 TSMC가 제조한 칩셋을 탑재한 동일 모델보다 배터리 소모율이 유의미하게 높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애플은 성명을 통해 "고부하 환경은 사용자의 일반적인 사용 환경을 대변하지 않으며 내부 조사결과 제조사간 차이는 2~3%에 불과하다"고 반박했으나, 그 시점부터 현재까지 TSMC만을 고집하고 있다.
퀄컴 엔지니어들이 학을 떼는 PDK
필자가 위의 포스팅을 올릴때는 첨단공정 수율이 이토록 처참할 줄 모르고 중요하지 않다고 실언했다. 당시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삼성전자의 엉망진창인 PDK(프로세스 디자인 키트)다. 퀄컴과 같은 팹리스 반도체 기업의 설계 엔지니어들은 파운드리에서 제공하는 PDK를 기반으로 설계, 시뮬레이션 및 검증을 수행한 후 설계도를 파운드리에 전달하고, 파운드리는 해당 설계도를 토대로 칩을 생산한다. 문제는 시뮬레이션과 실제 생산된 칩의 성능 차이가 너무 컸다는 것이다, 나쁜쪽으로.
근본 원인: 기업문화
굉장히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만 생기면 "기업문화가 문제였다"고 뭉뚱그려 결론짓는 HR 전문가들이 많은건 알지만,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려는게 아니다.
2022년 4월 SemiAnalysis(반도체 리서치사)의 대표가 삼성전자의 유해한 기업문화가 반도체 부문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에 대해 작성한 글을 참고해보자:
...문제는 파운드리 및 디자인 팀이 기술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삼성전자에는 실수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부서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성 LSI(설계)는 삼성 파운드리를 탓하고, 삼성 모바일은 LSI를 탓하고 있습니다.
당시 삼성전자가 설계하고 제조한 갤럭시 신모델에 탑재된 Exynos 프로세서는 경쟁사 퀄컴의 동세대 칩셋에 훨씬 못 미치는 성능을 보여줘서 논란이 되었는데, 탑재 결정을 한 모바일 사업부는 LSI(설계) 사업부를 탓하고, LSI는 칩을 제조한 파운드리 사업부를 탓하는 blame game(서로 꼬리를 물고 원망하는 현상)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해당 분석글이 게재되고 2년반이 지난 지금에도 사업부간 blame game은 이어져 현재 개발되고 있는 차세대 Exynos 프로세서 또한 경쟁사 퀄컴에 비해 낮은 성능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더 큰 문제는 신규 공정의 수율이 너무 낮아 내년 출시되는 갤럭시 S25 모델에 탑재가 아예 불발되었다는 것.
...5년 전만 해도 삼성은 집적도, 성능, 비용 구조에서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보다 월등히 앞섰습니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당시에는 1년 반 정도 앞섰다고 합니다. 현재 삼성은 마이크론과 SK하이닉스에 비해 생산량이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표에서 뒤처지고 있습니다. 문화적 문제에서 비롯된 삼성의 지나치게 공격적인 신공정 개발 행태가 그 원인입니다.
2020년대를 기점으로 삼성전자의 핵심 경쟁력이었던 DRAM 부문마저도 경쟁사 대비 성능, 원가 구조에서 뒤쳐지기 시작했다. 201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SK하이닉스나 마이크론 대비 1.5년 정도 기술이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경쟁사가 신제품 개발을 발표하면 삼성전자는 대량 양산을 시작한다는 뜻의 '양산전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는데, 이제는 3위인 마이크론을 뒤쫓아가는 형국이 된 것이다.
...삼성은 EUV 도입에 매우 공격적으로 나서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엔지니어링이 아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결정이었습니다. 이러한 하향식 결정은 일반적으로 삼성전자 내에서 매우 흔한 일이며, 우리가 지적해 온 문화적 문제의 결과입니다. 삼성은 1Z 세대에서 EUV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발표는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이루어졌습니다. 삼성은 이 '업적'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삼성전자에는 언젠가부터 엔지니어링에 집중하기보다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업적에 얽매이는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고, 이는 기술력의 근본적인 저하로 이어졌다.
메타의 창업자이자 CEO인 마크 주커버그는 며칠전 Acquired 팟캐스트에서 "리더들이 기술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없다면, 그 회사는 기술기업이 아니다"고 발언했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회장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그는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와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최근에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게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던 그룹 2인자 정현호 부회장은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애플처럼 기술기업에 가깝지만 기술 전문가가 아닌 CEO(팀 쿡)가 이끄는 성공적인 기업들도 있다. 당장 이재용 회장과 정현호 부회장이 경영에서 손을 놓아야 삼성전자가 다시 비상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대로 침몰한다는 주장은 비약이다. 그러나 고위 임원들의 KPI가 잘못 설정 되어있고, 이로 인해 회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건 분명해보인다. 나는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적합한 자리에 앉히고, 내 권한을 위임하는것이라 배웠다.
한 명의 천재가 천 명을 먹여살리는 시대는 갔다
이제 기업이 혁신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지식의 범위는 개개인이 저장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을 아득히 넘어섰다. 그 어떤때보다 '협력'과 '지식의 마찰없는 공유'가 중요해진 이유이다.
삼성의 기업문화는 어떤가? 인사와 보상은 선대 이건희 회장이 고안한 '신상필벌' 원칙에 머물러 있는데, 회사의 덩치는 공룡처럼 커져버렸다. 같은 회사안에 수많은 사업부가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성과를 내려 노력한다. 좋은 재료를 쏟아 붓더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요리는 망한다. 흑백요리사 안봐도 안다.
삼성전자는 뭐하는 회사인가? 미션이 무엇인가? 고객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가?
똑같은 답변이 나올수가 없다. 지금껏 삼성전자 직원들은 공통된 목표를 향해 하나된 마음으로 일하고 있었을까.
오로지 한 사람의 강력한 의지만이 삼성전자의 문화를 혁신할 수 있다.
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