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1월 08일
사실과 지성에 기반해야 할 산업정책, 비전문가 말은 이제 그만
성륜수

반도체는 ‘정치’가 아니라 ‘물리학’이다: 비전문가의 궤변이 국익을 해칠 때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명운이 걸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두고 난데없는 ‘호남 이전론’이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다. 이미 국가 전략으로 확정되어 수십조 원의 자본이 투입되고 터 닦기 공사가 한창인 현장을 두고, 정치적 셈법에 기인한 수정주의가 고개를 드는 것이다. 이 위험한 주장의 중심에는 자신을 싱가포르 소재 반도체 전문가라 칭하는 이봉렬씨가 있다. 그는 “기술은 어디서든 구현 가능하며,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호남이 최적지”라며 대중과 정치권을 호도하고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반도체는 표 계산기로 작동하는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나노미터 단위의 오차도, 0.001초의 전력 불안정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한 물리학과 엔지니어링의 세계다. 비전문가의 그럴듯한 궤변이 국가 백년대계의 발목을 잡으려 하는 지금, 우리는 감정을 배제한 차가운 팩트(Fact)와 산업 논리(Logic) 앞에 마주 서야 한다.
레시피를 따르는 자와 레시피를 만드는 자의 차이
이봉렬씨의 주장이 가진 가장 큰 오류는 ‘반도체’라는 단어 하나로 모든 기술을 퉁치려 한다는 점이다. 그가 재직 중인 STMicroelectronics 싱가포르 팹은 전력 반도체(PMIC)나 마이크로컨트롤러(MCU) 등 주로 90nm(나노미터)에서 180nm 수준의 성숙 공정(Mature/Legacy Node)을 다룬다. 이는 이미 20년 전 기술적으로 완성되어,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장비를 운용하고 생산성을 관리하는 것이 핵심인 영역이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용인에 짓는 공장은 3nm급 초미세 선단 공정(Advanced Node)이다. 이곳은 단순한 생산 시설이 아니다. 양자 터널링 효과와 같은 물리의 한계에 도전하며, 매일 새롭게 발생하는 수만 가지의 변수를 잡기 위해 수천 명의 박사급 엔지니어가 실시간으로 공정에 들어가는 수백가지 화학 소재 레시피를 수정하고 재설계해야 하는 거대한 R&D 융합 기지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화자의 전문성이다. 해당 기업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이봉렬씨는 공정의 설계를 주도하는 엔지니어(Process Architect)가 아닌, 정해진 공정을 운용하는 생산직(Production Staff)인 것으로 파악된다. 비록 해당 기업이 생산직군에게도 'Engineer' 직함을 부여하지만, 공정의 ‘Why and How’를 연구하는 것과 ‘What’를 수행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성숙 공정에서의 ‘매뉴얼 준수’ 경험을 근거로 초미세 공정의 ‘입지 결정’을 논하는 것은, 동네 빵집에서 빵을 구워본 경험으로 최첨단 분자 요리 연구소의 입지와 설계를 훈수 두는 격이다.
인재는 ‘땅’이 아니라 ‘지적 생태계’를 보고 움직인다
“조건만 좋으면 인재는 지옥이라도 간다”는 주장은 반도체 혁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다. 혁신은 문서화된 지식(Explicit Knowledge)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공유하는 암묵지(Tacit Knowledge)에서 나온다.
판교(설계)-기흥·화성(메모리/파운드리)-평택으로 이어지는 ‘K-반도체 벨트’는 단순한 공장 부지의 나열이 아니다. 팹리스의 설계가 팹에 적용되고, 소부장 기업의 장비가 라인에 깔리며, 대학의 연구가 현장에 투입되는 거대한 지적 생태계다. 엔비디아와 애플이 살인적인 물가와 세금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그곳에 대체 불가능한 ‘인재 밀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적 논리로 용인 클러스터를 호남으로 강제 이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고급 인력들은 호남으로 가는 짐을 싸는 대신, 미국이나 일본행 비행기 티켓을 끊을 것이다. 용인은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인재를 붙잡아두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 지리적 마지노선이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기업들에게 “글로벌 인재 전쟁에서 기권하라”고 등 떠미는 자해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본지가 질의한 한 AI 메모리 스타트업 이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한국 인재 기준으로 서울에서 버스(회사 셔틀)로 통근시간 1시간 정도가 마지노선으로 보입니다. 삼성이나 SK하이닉스 같이 회사 셔틀이 제공되면 조금 넘어가도 가능하나, 자차나 대중교통 이용으로 1시간권이 넘어가면 뽑기 어려워요.
아무래도 인재풀에 있는 분들은 자녀의 교육 인프라 때문에 서울 경기권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시죠.
에너지 정책의 무지: 전기는 ‘택배’로 받는 것이다
“호남에 태양광이 많으니 공장을 옮기자”는 주장은 전력망(Grid)의 기본 원리인 주파수 동기화와 송전 효율을 간과한 발상이다. 반도체 팹은 24시간 365일, 전압과 주파수가 칼같이 일정해야 하는 정밀 시설이다. 기상 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태양광 발전을, 거대한 완충 장치인 국가 전력망(Grid)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공장에 연결한다는 것은 기술적 자살 행위다.
애플(Apple)이 달성하고자 하는 RE100 정책은 공장 바로 옆에 풍력 터빈이나 태양광 패널을 세워서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고도화된 전력망을 통해 원격지에서 생산된 재생에너지를 구매(PPA)하거나 인증서를 통해 상쇄하는 방식이다. 즉, 핵심은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연결망이다.
호남의 잉여 재생에너지를 활용하는 과학적 해법은 수백조 원이 드는 공장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전기를 수요처인 수도권으로 실어 나를 ‘초고압 직류송전(HVDC)’망을 확충하는 것이다. 안전성이 입증된 송전탑 건설을 과학적 근거 없는 ‘전자파 괴담’으로 가로막고, 그 대안으로 공장 이전을 주장하는 것은 꼬리가 몸통을 흔들다 못해 몸통을 부러뜨리자는 격이다.
팩트체크 시트
| 주장 | 팩트 | 근거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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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반도체 전문가로서 조언한다" (이봉렬 씨 주장) |
[기술 격차] 성숙 공정 vs 선단 공정 그가 재직 중인 STMicro 싱가포르(Ang Mo Kio) 팹은 8인치 웨이퍼 기반의 전력/아날로그 반도체를 생산하는 성숙 공정(Mature Node)입니다. 이는 삼성/SK가 용인에 건설 중인 2nm/3nm급 초미세 공정과 기술 난이도 및 운영 방식이 다릅니다. |
STMicro 제조(Manufacturing)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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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어디서든 구현 가능하다" (입지 무용론) |
[R&D 집약도] 30년의 기술 격차 미세 공정은 단순 제조가 아닌 거대한 R&D 융합 시설입니다. 1%의 수율 향상을 위해 수천 명의 석/박사급 인력이 실시간으로 협업해야 하므로 인재 밀도(Density)가 높은 수도권 클러스터가 필수적입니다. |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식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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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100 위해 호남으로 가야 한다" (재생에너지 입지론) |
[에너지 정책] 전력망(Grid)과 PPA Google, Apple 등 글로벌 기업은 발전소 옆에 사옥을 짓지 않습니다. 고도화된 전력망(Grid)을 통해 전력을 공급받고 PPA(전력구매계약)로 탄소 중립을 달성합니다. 해법은 공장 이전이 아니라 송전망 확충입니다. |
Google 24/7 Carbon-Free Energy Apple 환경 정책 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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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탑 반대는 정당하다" (전자파 유해성 주장) |
[과학적 사실] WHO 안전성 기준 세계보건기구(WHO)는 낮은 수준의 자계 노출이 암을 유발한다는 증거는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국제 기준 내 설치 시 송전선로는 안전합니다. |
WHO 전자기장(EMF) 건강 주제 |
산업 정책은 ‘선동’이 아닌 ‘과학’의 영역이어야 한다
반도체 클러스터는 국토 균형 발전이라는 정치적 아젠다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는 미·중 기술 패권 전쟁 속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생존 방주’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전문가의 설익은 주장을 받아적는 것이 아니다. 밤을 새워 물리의 한계와 수율 향상을 위해 싸우는 현장의 엔지니어들, 그리고 글로벌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기업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전문가 호소인’의 선동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용인 클러스터의 성공적 안착과 송전망 적기 확충이라는 본질적 과제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과학과 산업의 영역을 정치로 오염시켰을 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역사는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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